개인적인 술자리를 가질 때 불행히도 옆자리에 생체확성기가 앉았을 경우
1) 주인에게 양해를 구하고 살금살금 자리를 옮긴다.
2) 주문 전이라면 "미안합니다, 다음에 올게요."
나같이 예민한 놈이랑 술을 먹는 게 얼마나 고역일지.
소수의 파트너들에게 그래서 늘 고맙고 미안하다.
모처럼 알게 된 이자카야에 사흘을 내리 찾아갔다.
서울에서 정말 보기 드문
맛있고 깨끗하고 친절하기까지 한데다 좋은 재료를 쓰면서 가격마저 적절한.. 거의 기적이라 할만한 주점이다.
경험상 서울에서 이런 집은 초심모드 퀄리티를 1년 이상(..SNS 월드 도래 이후 6개월 이상..) 유지하기 어려우므로
맛집으로 확실히 뜨기 전에 (..주인에게는 미안하지만 입소문은 가급적 '최소한'으로 내면서..) 집중적으로 이용하다가 하강곡선이 누차 감지되면 가차없이 발을 끊는 게 좋다. 즐거웠던 기억이 훼손되기 전에.
짜지 않은 장어소금구이, 포들포들한 순두부튀김의 진맛에 오랜만에 감동하며 촌스럽게 사진까지 찍었는데
옆옆자리 (옆자리는 공석) 아가씨의 스피커가 젓가락질의 집중도를 차츰 둔화시켰다.
내벽마감이 목판이라 소리는 우렁차게 울린다. 공간이 완벽할 수는 없는 법.
여자의 맞은편에는 남자 두 명이 앉아있었다.
전면주시에 노력하던 내 귓불을 끌어당긴 첫 대사는 (아마도) 이거였다:
"도대체 요즘 남자들은 왜 이렇게 매너란 걸 모르는 거니?!"
..음. 그런가. 그럴지도.
"20대 때 만났던 남자친구들이 요즘은 정말 너무 원망스러워! 왜 그렇게 하나같이 나한테 지극정성 잘 해 줘서 그때 그들의 그런 매너를 누구나 당연히 하는 걸로 생각하게 만든 건지!"
...으응?
"그때 걔들은 아침 7시 8시 학교 가기 전에 내 얼굴 10분이라도 보겠다고 2시간 넘는 거리를 힘든 기색 하나 없이 찾아와서는 잠깐 보고 싱긋 웃으면서 돌아가고 그랬어. 얼마나 매너가 있었다고 걔들은!"
....??????
묵묵히 듣고 있던 남자 한 놈이 다행히도 그럭저럭 적절한 답을 내밀었다: "야, 넌.. 그게.. '매너'였다고 생각하니."
.....휴. 남자애 둘 모두가 바보 천치는 아니었군. 당장 일어나서 뒤돌아 나가지 않는 건 분명 정상이 아니지만.
"아냐! 그런 게 바로 진짜 매너야! 여자한테는 그래! 남자들은 모른다고!"
..........;
"솔직히 나 정도면 정말 착한 여자 아니야?! 근데 요즘 남자들은 왜 그렇게 갈수록 다들 계산적인거야?!"
...............!
"내가 뭐 틀린 소리 했어? 그런데 왜 이 가게 사람들 다 이렇게 조용해졌지?!"
..................;;;
혹시. 일반인 몰래카메라 였을까.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화장실 참듯 참는 건 둘째치고
상판 한번 확인해보고 싶은 욕구를 눌러 참기 위해
한참동안 고개 숙이고 홀짝홀짝 참배하듯 술만 마셨다.
자기한테 시선 한 번 돌려달라고 오버하는 여자들한테 엉겁결 시선을 던져 빤히 들여다보이는 과시욕을 만족시켜 주는 건, 정말 싫으니까.
다행히 그들은 곧 자리를 파했고
참았던 웃음을 겨우 시원하게 화악 털어낼 수 있었다.
20대 때의 나도 몇시간이든 기쁘게 달려 누군가를 잠깐 보러 가곤 했다. 자주. 이른 아침. 늦은 밤.
그게 나의 '매너'였다고 기억되지는 않을 거다. 아마. (그렇겠지..? ㅎㅎ;)
어쨌든
덕분에 오랜만에 한참동안 시원하게 소리내 웃었다.
맞은편에 앉아 있어 고개를 돌리지 않고도 얼굴을 쉽게 확인할 수 있었던 동행에게 '많이 예쁜 여자였냐'고 물었다.
"아니. 눈이랑 입술 튀어나오고.. 붕어 닮았던데."
.........................;
매너 확실했던 10여 년 전 그 사내아이들은 한무 같은 외모의 여자를 좋아했단 말인가.
아니면 한 여자의 인생을 망치기 위해 일부러 그런 짓을..?
아무튼
연신 귀를 의심하면서
매우 유쾌했도다.